[이정식의 가곡에세이] (57) 힌 천재 문학가의 의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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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의 화재인가, 자살인가
1972년 10월 27일. 토요일.
이날도 여느 토요일처럼 친구 황규정군과 만나 술을 한잔 할 예정이었다. 황규정은 그의 고교동기생으로 서울에서 하숙도 같이 할 만큼 친한친구였다. 막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사법연수원에 다니고 있었다.
두 사람은 별일이 없으면 토요일에 만나 술잔을 기울이곤 했다. 당시에는 돈벌이 하던 김민부가 주로 술값을 냈다. 이날 황규정은 약속 장소에 늦도록 나타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생겨 약속장소에 갈 수 없었던 것이다. 김민부는 그를 두 시간이나 기다리다가 오후 늦게 갈현동 집으로 들어갔다.
이후의 상황은 사람들마다 조금씩 이야기가 다르다. 이 무렵 김민부는 연말 특집 방송 원고3천매의 부담감 때문에 예민해 있었다.
저녁을 먹으면서 부인과 언쟁을 벌인뒤 화가 나서 방문열쇠를 창밖으로 던져놓고 석유난로를 발로걷어 차 불이 났다고 하는 이가 있는가하면, 그날 저녁 날씨가 갑자기 추워져 석유난로를 피우고 원고를 쓰다가 날린 폐지에 불이 붙어 화재가 난 것이라는 주장이 그것이다.
후자는 그가 자살을 자주 이야기한 것은 맞지만 천성적으로는 낙천적이었으며 당시 자살할 이유가 없었다는 것이다. 어찌되었건 그의 죽음과 관련해서 늘 자살이냐 단순사고사냐 하는 의문이 따라 다닌다.
이날 부인이 불길한 예감이 들어 안방으로 달려갔을 때 이미 그의 온몸에는 석유난로의 불길이 번져 있었다. 엉겁결에 덮쳤지만 부인도 같이 화상을 입고 말았다. 두 사람은 적십자 병원으로 옮겨졌다. 김민부에게는 90% 화상의 진단이 내려졌다. 그는 이틀 후 숨졌다.
부인은 얼굴에 큰 화상을 입었지만 생명은 건졌다. 김민부를 보내는 영결식에서 선배 방송작가 한운사(1923~2009) 선생은 조사(弔辭)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아, 자네가 무슨 천재라고 이렇게 처참한 광경을 펼쳐 놓았는가! 이래야만 되었는가! 그래, 이 세상 가만히 보면 개똥같다. 인생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야. 우리보다 한발 앞서서 그것을 깨달은 그대! 그대는 그래서 천재인지 모르겠다. 잘가라…….”
김민부의 서라벌예대 동기인 이근배 시인은 그 자신이 꽤 명성 있는 시인임에도 ‘문학계에도 계급이 있다면, 자기가 일등병이라면 김민부는 사성 장군 같은 존재’라고 했다고 한다.
추모의 글에서도 그는 이렇게 썼다.
“대개 천재라는 말을 쓰는데 그것은 민부에게는 덜 어울리고 그 뭐 신과 천재의 중간쯤? 아무튼 민부는 우리 시대에 섬광(閃光)처럼 나타났다 사라진하나의 환영(幻影)같은 시인이다. ……천재시인들이 요절할 수밖에 없는 것은 신의 질투 때문이라고 한다. 참으로 버릇없이 신의영역(?)을 침범한 민부를 신은 어김없이 일찍 데리고 갔다.”
한편, 약속 장소에 가지 못한 황규정은 사고소식을 듣고 참담했다. 자신이 약속을 지켰더라면 나지 않았을 사고였을지 모른다는 죄책감과 미안함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김민부가 가고 난후 변호사가 된 황규정은 김민부의 딸 지숙에게 장학금도 대주고, 졸업 후엔 자신의 변호사 사무실에서오랫동안 일하도록 했다. 친구와의 우정과 의리를 평생 지킨 것이다.
김민부의 죽음과 관련해 자살이냐 아니냐 하는 논란이 있는가 하면, 조용필의 <창밖의 여자>가 김민부의 시냐 아니냐하는 논란도 있다. <계속>
#이정식의 가곡에세이 #이정식 #김민부 #죽음 #자살 #의문사 #사고 #화상
1972년 10월 27일. 토요일.
이날도 여느 토요일처럼 친구 황규정군과 만나 술을 한잔 할 예정이었다. 황규정은 그의 고교동기생으로 서울에서 하숙도 같이 할 만큼 친한친구였다. 막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사법연수원에 다니고 있었다.
두 사람은 별일이 없으면 토요일에 만나 술잔을 기울이곤 했다. 당시에는 돈벌이 하던 김민부가 주로 술값을 냈다. 이날 황규정은 약속 장소에 늦도록 나타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생겨 약속장소에 갈 수 없었던 것이다. 김민부는 그를 두 시간이나 기다리다가 오후 늦게 갈현동 집으로 들어갔다.
이후의 상황은 사람들마다 조금씩 이야기가 다르다. 이 무렵 김민부는 연말 특집 방송 원고3천매의 부담감 때문에 예민해 있었다.
저녁을 먹으면서 부인과 언쟁을 벌인뒤 화가 나서 방문열쇠를 창밖으로 던져놓고 석유난로를 발로걷어 차 불이 났다고 하는 이가 있는가하면, 그날 저녁 날씨가 갑자기 추워져 석유난로를 피우고 원고를 쓰다가 날린 폐지에 불이 붙어 화재가 난 것이라는 주장이 그것이다.
후자는 그가 자살을 자주 이야기한 것은 맞지만 천성적으로는 낙천적이었으며 당시 자살할 이유가 없었다는 것이다. 어찌되었건 그의 죽음과 관련해서 늘 자살이냐 단순사고사냐 하는 의문이 따라 다닌다.
이날 부인이 불길한 예감이 들어 안방으로 달려갔을 때 이미 그의 온몸에는 석유난로의 불길이 번져 있었다. 엉겁결에 덮쳤지만 부인도 같이 화상을 입고 말았다. 두 사람은 적십자 병원으로 옮겨졌다. 김민부에게는 90% 화상의 진단이 내려졌다. 그는 이틀 후 숨졌다.
부인은 얼굴에 큰 화상을 입었지만 생명은 건졌다. 김민부를 보내는 영결식에서 선배 방송작가 한운사(1923~2009) 선생은 조사(弔辭)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아, 자네가 무슨 천재라고 이렇게 처참한 광경을 펼쳐 놓았는가! 이래야만 되었는가! 그래, 이 세상 가만히 보면 개똥같다. 인생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야. 우리보다 한발 앞서서 그것을 깨달은 그대! 그대는 그래서 천재인지 모르겠다. 잘가라…….”
김민부의 서라벌예대 동기인 이근배 시인은 그 자신이 꽤 명성 있는 시인임에도 ‘문학계에도 계급이 있다면, 자기가 일등병이라면 김민부는 사성 장군 같은 존재’라고 했다고 한다.
추모의 글에서도 그는 이렇게 썼다.
“대개 천재라는 말을 쓰는데 그것은 민부에게는 덜 어울리고 그 뭐 신과 천재의 중간쯤? 아무튼 민부는 우리 시대에 섬광(閃光)처럼 나타났다 사라진하나의 환영(幻影)같은 시인이다. ……천재시인들이 요절할 수밖에 없는 것은 신의 질투 때문이라고 한다. 참으로 버릇없이 신의영역(?)을 침범한 민부를 신은 어김없이 일찍 데리고 갔다.”
한편, 약속 장소에 가지 못한 황규정은 사고소식을 듣고 참담했다. 자신이 약속을 지켰더라면 나지 않았을 사고였을지 모른다는 죄책감과 미안함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김민부가 가고 난후 변호사가 된 황규정은 김민부의 딸 지숙에게 장학금도 대주고, 졸업 후엔 자신의 변호사 사무실에서오랫동안 일하도록 했다. 친구와의 우정과 의리를 평생 지킨 것이다.
김민부의 죽음과 관련해 자살이냐 아니냐 하는 논란이 있는가 하면, 조용필의 <창밖의 여자>가 김민부의 시냐 아니냐하는 논란도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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